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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눈물 담긴 사부곡 - 국악인 신영희 -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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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528
등록일 : 2009.07.07 16:50

눈물 담긴 사부곡 - 국악인 신영희

 휴먼토크 『내 마음의 고백』
7월 10일(금) 저녁 8시 40분 방송 


KTV 한국정책방송원(원장 손형기)은 이 시대, 희미해져가는 ‘인정(人情)’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을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40분에 방송하고 있다. 이번 주는 국악계의 팔방미인 신영희 명창을 만나본다.


       


 □ 중요무형문화제 제 5호로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이자 세계적인 소리꾼 신영희, 선이 굵고 맑은 남도 소리의 진수를 보여주며 올해로 58년째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소리가 외면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 것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뚝심으로 결코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젠 마니아층을 형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의 생애 최초 스승이자 아버지인 신치선 명창을 향한 눈물 담긴 고백을 들어본다.


 고된 소리꾼의 길,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걸었기에 행복했던 시절


      그녀가 처음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52년 11살 때였다. 당시 집에서 작은 국악원을 운영하던 아버지 신치선 명창의 소리를 들으며 자란 신영희.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우던 제자보다 뛰어나게 노래를 불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 신치선 명창은 신영희가 소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딸이 자신과 같은 소리꾼의 길을 걷는 것은 완강히 반대했다. 당시 소리꾼들은 유랑을 하며 가난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여자들은 소리를 배우면 명창보다는 기생이 되기 쉬운 때였기 때문에, 소리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좋지 않던 시절이었다. 신치선 명창은 누구보다 그 현실을 잘 알았기에 자신의 딸에게 소리를 전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농사꾼의 아내로 사는 것보다 명창 소리를 들으며 사는 것이 낫다’는 아내의 말과 신영희의 소리에 대한 천부적인 끼를 보며 신치선 명창은 결국 딸에게 자신의 소리를 전수하게 된다. 신영희가 소리꾼으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소리를 하는 사람은 순수해야 고운 소리가 난다고 늘 입버릇처럼 딸에게 말했던  신치선 명창. 그에게 배운 소리와 마음가짐은 신영희의 소리 인생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신영희가 소리를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얼마 후 구수하고 진한 소리로 점차 명창에 가까워지는 어린 신영희를 데리고 다니며 소리를 시킬 정도로 자랑스러워했던 신치선 명창. 그에게 신영희는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대견한 딸이자 후계자였던 것이다.


소리로 오가던 부정(父情),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신영희를 위해 진도에서 목포로 이사를 갈 정도로 지극한 뒷바라지를 해줬던 신치선 명창은 목포로 올라오고 얼마 후 지병으로 몸져눕게 되었다. 당시 신영희는 소리꾼으로 소문이나 잔칫집 등에서 판소리를 하며 약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신영희는 아버지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으로 병원 치료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에 어린 신영희는 자신이 번 돈으로 적게나마 인도 사과 등을 사가지고와 즙을 내어 아버지께 드리곤 했다. 당시 신영희는 16세, 신치선 명창의 나이는 59세였다.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해 명을 달리한 신치선 명창은 자신의 딸이자 후계자인 신영희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창이 되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신치선 명창이 별세한지 5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신영희는 아버지를 위해 소리 한 가락 못 해 드린 것이 마음에 남아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젖어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전설적인 남도창들에게 사사를 받으며 끊임없이 소리를 갈고 닦은 신영희. 그녀는 타고난 순발력과 재치로 국악계를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도 이름을 알리며 국악 대중화의 토대를 마련하며 국악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도 굳혀나갔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명창 신영희. 그녀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남도민요보존을 위해 후학 양성에도 많은 힘을 쓰고 있다. 그녀의 그러한 노력과 땀이 씨앗이 되어 국악의 대중화를 이뤘고 또한 2003년에 국악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영희 명창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국악이야기와 아버지 신치선 명창을 향한 그녀의 눈물어린 고백을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에서 들어본다.



□ 이 밖에도 <바보사랑, 더 사랑하겠습니다>에서는 개그맨을 꿈꾸는 29살의 청년,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주는 것이 그에겐 더할 수 없는 행복인 이용재 씨, 지난 10년 동안 계속된 개그맨 도전에 어머니의 반대는 심해지고, 모자 관계는 점점 악화되는데... 나이제한이 있어 이제 남은 기회는 단 1번. 그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설득의 고백을 들어본다. 


이 보도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KTV 방송제작 1과 추동진PD(☎ 02-3450-2248)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첨부1. 휴먼토크 내 마음의 고백 신영희 명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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