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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국민방송

5·18 40주년 [유용화의 오늘의 눈]

KTV 대한뉴스 월~금요일 19시 00분

5·18 40주년 [유용화의 오늘의 눈]

등록일 : 2020.05.19

유용화 앵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5월 18일 광주.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신군부 세력은 선량한 광주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사를 감행했습니다.

자신들의 부당한 집권 야욕을 위해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국가폭력에 대항해 광주시민들은 저항적 자위권을 발동했습니다.

신군부의 공수부대와 계엄군에 대항해 일대회전을 감행했고, 21일 광주의 자유 민주화 시민군은 계엄군을 광주시 외곽으로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전남도청을 장악했습니다.

27일 계엄군의 상무 충정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 광주는 시민들의 자치와 자유의 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주를 둘러싼 계엄군의 화력 앞에서 광주시민들은 물러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향후 한국 민주화운동에 기념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광주로 인해 전두환 신군부의 폭력성과 잔인성이 드러나면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은 부정되었습니다.

광주로 인해 민주화 운동은 더욱더 확산하였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요구는 국민적 공감대로 이어졌습니다.

학생운동은 더욱더 대중적으로 발전했고, 사회운동도 탄력을 받아 조직적으로 확산하였습니다.

숨죽이고 있었던 정치권도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의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국민적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6월 제부 문의 운동 세력과 재야 세력, 그리고 정치권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공동 목표로 결집했으며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6. 29 선언을 이끌어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과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요.

1980년 5월 광주가 현재 우리가 공기처럼 숨 쉬고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숨결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87년 6월항쟁 이후 대한민국은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도 뽑을 수 있게 되었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과 실질적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주는 아직도 누가 최초의 발포 명령자인지, 300여 명의 암매장의 실체는 무엇인지, 성폭력과 인권침해 실태는 어떠한지, 아직도 밝혀져야 할 사실들이 남아있습니다.

40주년을 맞아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11일 어렵게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진상조사위의 인력 부족과 기한, 강제 수사권은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더욱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일이 산 자의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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