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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100주년 [유용화의 오늘의 눈]

KTV 대한뉴스 월~금요일 19시 00분

봉오동 전투 100주년 [유용화의 오늘의 눈]

등록일 : 2020.06.09

유용화 앵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홍범도 장군의 영웅적인 항일 투쟁을 기리고 봉오동전투 전승일에 대해서 기념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100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은 승리와 희망을 만든 국민의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결성된 이후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독립군을 통일해야 한다는 중요성이 합의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만주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항전하던 독립군들을 임시정부 산하로 재편하였고, 그 첫 번째 전쟁이 바로 봉오동 전투였습니다.

홍범도의 대한북로 독군부는 중대와 소대의 편제를 갖추고 상촌에 있는 연병장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한 준비된 독립군 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기관지인 독립신문 85호에는 봉오동 전투의 전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군들은 봉오동 전투가 공식적인 독립전쟁의 1호 승리라고 한 것이죠.

1868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산포수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부터 의병전쟁에 참가한 인물입니다.

'날으는 홍범도'라는 명칭을 얻을 정도로 일본군 격퇴에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홍범도 장군은 1908년 이후에는 연해주로 이동해서 동만주 지역을 그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었죠.
그는 간도와 두만강, 백두산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일진회 회원들과 친일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홍범도 부대는 그 거처를 옮겨, 동만주 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을 소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들을 상대로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대첩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1921년 1월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자유시로 근거지를 ?기게 됩니다.
본군의 대대적인 대만주, 대간도 토벌작전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인데요.
러시아의 볼세비키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시 사변이 일어나고 러시아 공산당의 통제가 심해지면서 장군의 활동반경도 제약되었습니다.
결국 1937년 9월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으로 쫓겨가 1943년 10월 25일 이국의 땅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홍장군은 2009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는데요.
정세균 총리는 이날 기념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오겠다고 밝혔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웠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하루라도 빨리 모셔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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