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메뉴바로가기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본문

보도자료

공공누리 공공제작물 자유이용허락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1유형 [출처표시-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 삶의 등대, 나의 아버지…"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의 고백 -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

글자확대 글자축소
조회 : 2351
등록일 : 2009.09.17 12:53


“내 삶의 등대, 나의 아버지…”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의 고백

-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9월18일(금) 밤 8시40분 방송 -


□  KTV 한국정책방송원(원장 손형기)은 이 시대, 희미해져가는 ‘인정(人情)’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을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40분에 방영한다.

        


□  이번 주는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 폴 미첼이 극찬한 제자, 보그 잡지가 선정한 세계 20대 헤어드레서로 선정된 바 있는 최초의 한국인, 세련된 커팅 방식으로 1970년대 단발머리 열풍을 일으켰던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를 만나본다. 이혼과 낯선 미국 땅에서의 공부, 세 번의 암 발병 등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삶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아버지에 대한 그의 특별한 인생 고백을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에서 만날 수 있다.



이 보도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한국정책방송(KTV) 방송제작1과 추동진PD(☎ 02-3450-2248)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붙 임 1.

 1970년대 단발머리 열풍을 일으켰던 헤어디자이너

이혼과 세 번의 암을 이겨낸 역경의 삶


□  그레이스 리는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한창이던 부산 피난 시절에 열아홉의 나이로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권위적인 남편과 갈등이 점점 깊어지면서 결국 이혼에 이르고, 마음은 찢어지지만 세 아이들을 한국에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 꼭 성공해서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한 그는 낯선 미국 땅에서 열심히 미용 공부를 시작한다. 그레이스 리는 윌프레드 아카데미를 거쳐 헨리 벤델 미용실에 취직해 미국에서 점차 주목받는 헤어드레서로 성장하지만 아이들과 재회하기 위해 귀국을 감행한다.


□  한국에 돌아온 그레이스 리는 세련된 커팅 방식으로 단발머리 열풍을 일으키며 인생의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러나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2001년 유방암, 2007년 위암, 2008년 대장암까지. 그의 몸에는 암세포가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한다. 하지만 그는 굳건하게 첫 번째 암을 이겨낸 뒤 일흔둘의 나이에 통영에서 ‘중국요리 이 선생’이란 이름으로 중국 음식점을 낸다.


큰 용기와 도전하는 삶을 알려주신 아버지...


□  그의 아버지는 딸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가슴 아파하셨고, 이혼의 갈림길에 섰을 때도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져도 넌 뭐든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아버지는 그가 이혼하기 몇 년 전인 1961년에 돌아가셨지만 그의 인생에 큰 존재다. 그가 음식점을 차리게 된 것도 아버지의 남다른 미각 덕분이다.

    그가 가장 불행한 삶을 살던 시기에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시고 애달픈 마음으로 눈을 감으신 아버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