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지키지 못했던 어머니” 이기택 수석부의장의 고백 - 휴먼토크 『내 마음의 고백』 |
□ KTV 한국정책방송원(원장 손형기)은 이 시대, 희미해져가는 ‘인정(人情)’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을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40분부터 방영한다.
□ 이번 주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이기택 수석부의장을 만나본다. 4.19세대대표주자인 그의 정치활동을 묵묵히 믿어주고 무한한 사랑을 주신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께 전하는 그의 특별한 고백을 들어본다.
□ 엄한 아버지와 달리 한없이 넓은 사랑을 보여주셨던 어머니에 대한 따뜻함이 아직도 온기로 남아있는데… 이기택 수석부의장이 겪었던 당시의 정치 상황과 어머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의 고백을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에서 만날 수 있다.
이 보도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한국정책방송(KTV) 방송제작1과 추동진PD(☎ 02-3450-2248)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붙임 1.
4.19세대의 대표적 정치인
1967년~1996년에 걸친 7선 국회의원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이기택. 그는 1960년 고려대 학생위원장으로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해 4.19의 도화선을 당겼던 4.19세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그는 4.19혁명 당시 활동이 계기가 되어 젊은 나이에 정계입문을 하게 된다.
1967년 신민당 소속의 전국구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당시 29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는 진기록을 세운다. 이후, 그는 부산 동래구로 지역구를 옮겨 8·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신군부 집권 시절 정치규제법으로 인해 11대 국회에 출마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1967년 7대부터 1996년 14대에 걸친 7선 국회의원을 지낸다. 그는 7선 의원을 거치면서 신민당 부총재, 통일민주당 부총재, 옛 민주당 총재를 역임하는 등 거물 틈새에서 당내에 자신의 계보까지 조직할 정도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펼친다.
□ 196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정치활동을 하는 원로 정치인 이기택. 그는 다양한 시대의 역사와 명암을 지켜본 정치인이다.
그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는 불리는 그날 학생 신분으로 선언문을 낭독하고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다. 당시 고려대 학생위원장이었던 그는 학생 운동을 주도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경북 포항 출생으로 머슴 서넛을 두고 농사를 짓고 있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나설 수 있던 이유는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과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덕분이다.
4.19혁명을 계기로 정치계에 입문을 하게 된 그의 뒤에서 묵묵히 응원을 해 주셨던 어머니. 바쁜 정치활동으로 집안일을 신경 쓰지 못했던 그를 대신해 어린 며느리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푸신 어머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사무치는 마음...
□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규제법에 묶여 제11대 국회에 출마하지 못하는 등 당시 그는 정치 활동에 억압을 받게 된다. 그런 그에게 펜실베이니아 대학 객원 교수로 오라는 초청이 들어온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져 병중에 계신 상태였다. 그는 병중에 계신 어머니를 두고, 해외로 떠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과 어머니 당신께서 다녀오라는 권유로 결국 펜실베이니아로 떠난다.
그는 한국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먼 타국에서 듣게 된다. 펜실베니아 객원교수로 간 것이 평생의 후회로 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