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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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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부른 사모곡 - '조선왕조 500년' 작가 신봉승- 휴먼토크 『내 마음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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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746
등록일 : 2009.10.29 09:22

못다 부른 사모곡 - '조선왕조 500년' 작가 신봉승

- 휴먼토크 『내 마음의 고백』
10월 30일(금) 저녁 8시40분 방송 -


□  KTV 한국정책방송원(원장 손형기)은 희미해져가는 ‘인정(人情)’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을 매주 금요일, 저녁 8시40분에 방영한다.

        

□  이번 주는 시인, 문학평론가, 소설가, 극작가 등 가히 르네상스맨이라 불리어도 아깝지 않은 작가 신봉승을 만나본다. 그는 특히 TV 장편 사극 ‘조선왕조 500년’의 작가로 유명한 방송 작가다. 그런 그의 문학적인 재능은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학교를 다니신 적은 없지만 집안의 종부로서 늘 지혜롭고 가족을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사셨던 어머니. 그의 인생 이야기와 어머니께 차마 전하지 못했던 고백을 『내 마음의 고백』에서 만날 수 있다. 



이 보도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한국정책방송(KTV) 방송제작1과 추동진PD(☎ 02-3450-2248)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붙임1.

정사(正史)의 대중화(大衆化)에 앞장서며 국민들에게

‘역사인식’을 심어준‘조선왕조 오백년’의 극작가, 신봉승

                           

□  신봉승 작가는 오늘날 우리 문단에서 문필(文筆)로 대업을 이룬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손꼽힌다. 일찌기 시인이며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명성을 자자하게 높이더니, 방송극 분야에서는 정사(正史)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하는 정통사극의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로 국민적 관심을 모아왔다. 그의 활동은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고 「왕조실록」의 방대한 사료를 기둥으로 총 48권이나 되는 대하역사소설 「조선왕조 5백년」을 엮어내는 등의 학구열을 보인 역사소설가로서도 이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  1933년 5월 23일, 강원도 명주군 옥계면 현내리에서 부농은 아니었지만 중농이상의 집안에서 종손으로 태어난 초당(艸堂) 신봉승. 그는 유학을 숭상하시던 할아버지 덕에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줄줄 외고 다녔으며, 만주국 황실소속의 사진 기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진촬영의 전문적 기술을 어린 나이에 터득하게 된다.


□  문화 환경이 열악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학교 시절, 무시로 극장에 드나들다가 두 번 정도 정학을 맞기도 했다. 학창시절 본인의 모습을 ‘자유분방했던 학생’이라 회상하는 그는 강릉농업학교를 다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에서 돌아와 강릉사범학교 교지에 ‘최인희’, ‘황금찬’ 시인의 이름을 보고 부모님 모르게 편입했다. 두 시인을 만나 문학의 길로 들어서면서 문사철(文史哲)을 난독하기 시작한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에 눈뜨게 된다.


    작가로서의 문학적 재능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신봉승 작가는 고백한다. 그  의 부친은 신만선(辛萬善), 모친은 최정애(崔貞愛). 이들 부부는 슬하에 자녀 삼남매를 두었는데 신본승은 그 중 외아들이자 맏이였다. 신봉승의 어머니는 만주에서 살고 있는 남편을 찾아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대륙의 수도 신경(지금의 長春)으로 가곤 했다. 남편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무학이었던 신봉승의 어머니는 명심보감과 논어를 외우고 직접 즉석에서 작사, 작곡한 노래를 즐겨 부르는 등의 모습을 보여 아들 신봉승에게는 누구보다도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모든 부모는 자식 사랑이 지극하다지만, 넉넉하지 않은 집안 환경과 1년에 한 두 번씩 집에 들어오는 남편이 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종부인 어머니의 자식 사랑과 가족을 위한 헌신은 각별했다. 특히 17년 간 아무런 불평없이 중풍으로 편찮으신 남편을 각별히 돌보는 어머니의 의연한 모습은 아들 신봉승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돌아가실 당시에도 “어머님, 위대하셨습니다.” 라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신봉승의 가슴에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