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메뉴바로가기

배너 닫기
윤석열 정부 출범 2주년 성과·과제 정책이슈 바로가기 의대 증원 필요성과 의사 집단행동 관련 영상보기 2024 KTV 편성개방 국민영상제(제5회)
본문

KTV 국민방송

내일을 향한 첫 발, 경부고속도로

-1968년 2월 착공해서 연인원 892만 8000여 명과 불도저 등 각종 장비 165만여 대가 투입돼 순수한 우리돈, 우리 기술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빨리 완공을 보아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그 개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길이 428km의 경제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세계 고속도로 역사상 최단기간, 최소비용으로 이루어낸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한국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시작했다.

또한 전 국토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어 국민들의 삶이 편리해졌다.

청와대에 파견되어 경부고속도로 전노선을 계획하고 확정짓는 데 기여한 윤영호 당시 육군 공병대령.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얽힌 뒷이야기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의의를 윤영호 당시 대령과 함께 이야기 나누어본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한늬우스의 그때 그 사람 고수웅입니다.

보다 빠르게 그리고 보다 값싸게 또 튼튼하게.

바로 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의 3대 구호였습니다.

지금부터 46년 전인 1968년 2월 1일은 바로 그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첫 삽을 뜬 날이었습니다.

어떻게 장장 428km의 고속도로가 단 2년 5개월 만에 건설이 가능했을까.

대한늬우스의 그때 그 사람.

지금 이 자리에는 당시 육군 대령으로서 청와대에 파견돼 경부고속도로 건설 업무를 맡으셨던 윤영호 회장이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뵈니까 참 건강해 보이시는데 회장님께서는 현재도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계시고 회장직으로 계시지만 그동안 평생을 토목과 건설을 위해서 일을 하셨고 그 수많은 일 중에서 군시절을 통해서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일, 바로 그 일이 개인적으로 보면 가장 의미가 클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평생 잊을 수가 없는 아주 그냥 감명이 깊은 일이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감히 생각도 못한 일인데 우리는 정말 필사적으로 그냥 열심히 일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그 고속도로가 1968년 2월 1일에 기공이 돼서 70년 7월 7일에 완공이 됐으니까 만 2년 5개월 만에 끝이 났는데 어떻게 그렇게 속사포로 이루어졌는지, 왜냐하면 고속도로를 만들려면 돈도 필요하고 기술도 필요하고 장비도 많이 들 텐데 어떻게 그렇게 가능했습니까, 그런 일이?


-그 당시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께서 설계에 대한 지침을 지시를 했습니다, 설계지침을.

그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는데 기층, 밑에 토공 기층은 탄탄하게 해야 되고 또 하나는 우리 군인들이 처음에는 주가 돼서 감독을 했는데 3교대 일을 했어요, 3교대.

공사가 중요한 데는 한 사람 필요할 것을 세 사람이 필요하게 해가지고 8시간만큼씩 교대해서 일을 하고.

그러면 시일이 빨리 되지 않습니까?

그런 문제하고.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우리 군에서 장비를, 중장비를 처음 우리 군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 중장비 가지고 공사를 하는데 어려운 곳, 군대에서 동원돼서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게 가능했는데 그런데 대장님께서는 공병 장교였었는데 어떻게 해서 군인인데 이 고속도로에 참여를 하게 됐어요?

뽑혀가실 때 어떻게 뽑혀가셨어요?


-뽑혀간 동기는 최초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울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하기 위해서 5군데에다가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지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4차선 고속도로를 만드는데 도상에서, 지도상에서 대략 예산이 얼마나 드느냐, 이걸 한번 따져봐라.

그래서 건설부, 서울시, 재무부, 현대건설, 육군공병 5군데를 했는데 그 마지막 결과의 보고를 공병감이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께서 얘기가 당신까지 내가 보고를 다 들었는데 앉으시오, 내 얘기 좀 들으시오.

당신까지 보고를 한 것을 들어보니까 어디는 650억이 든다, 어디는 280억이 든다, 어디는 400억이 든다고 이러니까 도저히 판단할 수도 없고 또 내가 이걸 추진하려면 내가 직접 해야 될 테니까 가거든 육군 대령 한 사람, 공병 출신 대령 한 사람, 또 공병 중령 한 사람을 보내주시오.

건설부에 기자급을 하나 불러봅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가지고 지시를 받고 오셔가지고 그래서 과장들하고 서로 상의를 하니까 윤영호 대령이 제일 나을 것 같습니다 해서 내가 선발돼서 갔더니 말씀하시기를 내일 아침에 바로 윤 대령은 청와대로 출근하시오.

그래서 그 이틀날 아침에 청와대로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민간 건설업자도 많고 한데 왜 하필 민간 건설업자를 제외하고 군인을 불러들였을까요, 대통령께서?


-공사의 어려운 곳은 육군 공병에서 하라고 말씀을 하셨고 또 최초의 감독도 우리 공병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면 첫째가 중장비를 가진 것이 육군에서 처음 중장비를 우리 공병이 가지고 있었고 또 그 다음에 군인들은 대통령께서 군생활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명령 잘 듣고 비밀도 지키고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해서 군에서 주동이 돼서 처음에 해라, 이렇게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려가셔서 처음 맡으신 일이 예산을 검토하는 일이었다면서요?


-처음에 맡은 일은, 내가 만나자마자...

청와대 김황렬 비서관을 만났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그러지 않아도 내가 가야 될 텐데 갑시다 그래가지고 대통령한테 갔더니  대통령께서 내 명찰을 보면서 윤 대령, 앞으로 나를 잘 도와주시오 하면서 하는 얘기가 우선 내가 필요한 게 지도인데 가서 지도를 구해 와야 되겠소.

그래서 내가 지도를 5만분지 1하고 1200분지 1의 지도를 육군본부에서 승인받아서 수령해다 갖다놨더니 말씀하시기를 육군대학에서 배운 대로 여기 색칠을 하시오.

그래서 색칠을 의성, 수원까지 색칠을 하라고 해서 하게 되고 그다음에 아까 얘기한 다섯 군데의 견적서를 내놓으시면서 이걸 가지고 가서 전부 분석을 한번 해 보시오.

그러면 분석이 되면 대략 예산이 얼마인지 나올 테니까 그걸 좀 하시오.

이런 임무를 받아서 방을 하나 구해서 우리가 일을 했습니다, 거기서.


-그러면 그 당시에 예산을 그렇게 살펴보실 때 각 서울시나 건설부나 또 현대건설에서 낸그 견적액수가 다 제각기 달랐습니까?


-280억부터 650억까지 차이가 났습니다.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네요.


-제일 적은 데는 280억, 제일 많은 데는 650억이고.


-그러면 그걸 조정해서 어떻게 뽑으셨습니까?


-항목별로 분석을 한 것입니다, 항목별로.

토공이면 토공, 항목별로 분석해가지고 보니까 예산이...


-얼마로 결정하셨어요?


-360억인가 나오더라고요.


-360억.

그러니까 공병을 투입하고요.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더 어려운 데 할 수 있잖아 해서 공병을 투입하게 됐습니다.


-참 예산 뽑는 것부터 노선확정 그리고 실제로 공사까지 대통령이 직접 관여하지 않은 그런 부분이 없을 정도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서 대통령의 애착이 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어떤 계기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됐는지 궁금합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1964년 말 서독을 방문한 대통령은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서독의 젖줄이 고속도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발전의 기반도 바로 고속도로가 될 거라고 확신한 대통령은 3년 뒤인 1967년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제시했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주재한 가운데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한 추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제1차 회의에서는 우선 서울-부산간의 고속도로 건설원칙과 그 대강의 테두리 및 추진상황 그리고 여기에 소요되는 자금의 조달방법 등이 보고됐으며 도로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토의됐다.


-그러나 당시 총 공사비는 전체 국가예산의 23%에 달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시작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굳은 의지와 결단력은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착공의 첫 삽을 뜨게 했다.


-금년부터 착수하는 경부간의 고속도 도로 계획, 이런 것은 과거 우리 민족의 하나의 꿈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꿈을 우리들의 기술과 우리들의 자본과 우리들의 노력으로써 한번 이루어보자.

아직도 아마 경부고속도 도로에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도 숫자가 더 많은 것으로 이렇게 듣고 있는데 나는 절대 된다고 여기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국가 1년 예산 중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23%가 든다 그러면 반대 안 할 사람이 없겠는데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 살림살이하는 1년 예산 규모가 얼마나 됐습니까?


-그때 내가 듣기는 우리나라 전체 1년 예산이 한 1600억 된다고 그랬습니다.


-1600억이요?


-그런데 고속도로에 400억을 투입하면 4분의 1을 투입한다고 그래가지고 그때 정치인들이 그냥 반대하고 야단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반대했던 여론세력들, 야당이나 또 고속도로 반대한 사람들은 뭐라고 그러면서 그걸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어요?


-반대한 사람들은 내가 신문에도 보고 듣기도 했는데 제일 첫째가 우리나라의 1600억밖에, 쓰는 예산의 4분의 1이나 많은 돈을 쓰는 게 하나고 두번째는 농사짓는, 농사짓는 농토에 비료가 없어 고생하는데 비료공장이라도 지어주고 그 돈을 그런 데다 쓰지 왜 이 고속도로에 쓰느냐가 이게 두번째 얘기고.

세번째는 차도 몇 대 없는데 세단차 타고 돈 많은 사람들 다니려고 그런다, 그게 지금 되느냐.

조금 더 있다가 예산도 나라가 많고 차도 많을 때 고속도로를 하지, 이게 무슨 짓이냐 하는 식의 얘기를 내가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참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먼 앞을, 장래를 내다보시고 좀 반대가 있었지만 그걸 밀어붙여서 일을 끝내셨는데 당시에 우리나라가 경제사정도 어렵고 전쟁 후에 정말 가난한 나라였는데 그래서 외국에서 차관도 주지 않았잖아요.

그 360억원이라는 재정을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차관해서 하려고 미국, 일본, 영국, 불란서 다 교섭을 한 모양인데 하나도 돈을 꿔주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독일에서만이 검토해 보자고 그랬답니다.

독일에서 하는 얘기가 너희 나라 자원이 없는 줄은 알지만 사람은 있지 않느냐, 이랬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있습니다 했더니 간호원하고 광부를 보내달라 그래서 그때 간호원하고 광부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2, 3년 있다가 박 대통령이 독일에 가서 보니까 간호원은 사람 죽는 시체를 치우는 게 간호원 일이고 광부는 그냥 1000m 밑에 내려가서 손이 시커멓고 그래서 얘기하다가 그냥 눈물을 흘리고 독일에다 대고 너희 나라는 2차대전 끝난 지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사느냐, 이렇게 독일에다 물어서 어디 좋은 거 보여줄 수 없느냐 그랬더니 고속도로를 보여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속도로를 한번 타보니까 160km인가 얼마를 달리니까 그냥 언뜻 생각이 이렇게 빨리 갈 수 있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독일을 직접 방문해 보시고 고속도로 건설을 결심하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 다음에 예산관계가 있는데 그 예산은 어떻게 됐느냐면 대일청구권 자금이 나왔고 잉여물자가 나왔고 그 다음에 마침 월남전쟁이 시작이 돼가지고 미국에서 원조를 받게 됐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합해 보니까 어떻게든지 절약해서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군에서 일부 지원이 되고 하면 돈도 그렇게 많이 안 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을 했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처음에는 대선공약으로 그걸 내세웠다가 결국은 대통령에 당선되신 다음에 계속 밀어붙여서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됐는데 대통령의 고속도로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 지도를 우리 회장님께 단축된 지도를 가져와라 이런 말씀을 하셨고 또 직접 지도를 펴놓으시고 노선도 이렇게 그리셨다면서요.


-나보고 그리라고 그래서 내가 그리니까 어깨를 툭툭 치시더라고요.

그래서 네 그랬더니 나를 손짓을 해가지고 창문가에 가서 창문에 대면 잘 보일 테니까 여기다 놓고 그리라고 하더라고요.

창문에 대고 그린 생각이 납니다.


-윤 회장님께서는 대통령 명령을 받으시고 이제 서울에서부터 수원까지 구간을 조사관으로 책임 맡으셨다면서요.

그 말씀도 좀...


-그러니까 5만분지의 1 지도는 대략적인 노선을 잡을 거고 1200분지의 1은 지도를 보시면 알지만 지적표가 나와 있어요.

그 지적표를 보면 누구라는 땅 이름을, 임자를 알 수 있습니다.

그걸 보시고 박 대통령께서 보시면서 도지사하고 서울시장한테 땅을 빨리 사도록 해야지 이러면 안 되겠다.

그래서 당시에 이후락 비서실장, 이런 사람을 불러서 빨리 회의를 합시다.

윤 대령이 갔다 와서 보고하니까, 내 생각하고 큰 차이 없으니까 빨리 이 노선에다가 수원까지 1단계로 땅을 사자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내일 아침에 그러면 도지사, 그다음에 서울시장, 건설부 장관, 거기 비서실장, 윤 대령도 나와야 돼 그래서 나왔는데.

10시에 이후락 비서실장한테 얘기하니까 이 사람은 바쁜데 10시가 뭐야.

9시로 하자 그래서 1시간을 당겨서 9시에 회의를 했습니다.

거기서 박 대통령님이 직접 계산하시고 다 하시는 것을 내가 옆에서 보고 확인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대통령은 토지 매입 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밀어붙이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설명을 박 대통령께서 땅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더라고요.


-어떻게요?


-서울시장하고 경기도지사는 지도 볼 줄 알아 그러면서 딱 가리키더라고요.

거기가 어디냐면 경계표시예요.

여기까지가 서울시고 여기는 경기도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땅을 사려면 평수를 알아야지.

내가 계산을 할 테니까 들어봐.

윤 대령, 나보고 옆에 앉아서 보래요.

평수 계산할 때 틀리면 얘기해, 그래서 네 말씀하시죠 그랬더니 계산을 하더라고요.

여섯 자 사방이 한 평이라는 거 다들 알지?

또 한 자가 30cm야, 알지?

한쪽이 1m 80cm이니까 한쪽이 3.2평방미터가, 한 평이 평방미터야, 알지?

이래놓고 5만분지 1의 지도를 딱 보시면서 여기 보면 한 칸이 1km야, 1000m야.

그러면 폭을 알아야 될 거 아니야.

폭을 내가 아는 것을 설명할 테니까 잘들 들어봐.

그래서 단면을 그리더라고요.

차선 하나가 3.6m인데 4차선이면 3.6의 4배면 얼마인지 알아, 14.4m야.

그것까지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중앙에 중앙분리대를 놓아야 돼, 중앙분리대.

그리고 양쪽에 로긴을 잡아야 돼.

그리고 평균 2m는 성토한다고 봐야 돼.

그러고 따지니까 37m인가 얼마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이걸 40m로 보자.

40m에다 아까 10km를 잡으면 4만평방미터 아니냐, 한 칸이.

5만분의 1 지도 한 칸이.

그럼 이걸로 나누면 평수가 나오지 않느냐.

그리고 1200분지 지도를 볼 줄 알아.

여기 보면 선대로 보면 여기 다 지적표가 나왔으니까

이 지적표대로 사면 돼.

그러니까 경기도지사가 그거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습니다.

측량하고 시간이 어쩌고 하니까 이 사람아, 그러면 오늘 회의 뭐하러 해.

그런 생각하지 마.

내가 시키는 대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무슨 말씀이냐면 도지사는 가면 군수 부르고 군수는 시장 부르고 해당 면장 불러가지고 이 지적도를 놓고 동의부터 받으라고.

그 다음에 측량 그런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거지 지금 급한 게 예산인데 언제 측량하고 뭐하고 하느냐.

가거든 동의부터 받으라고.

그 측량하는 데 몇 달 걸릴지 모르지만 동의하는 데는 며칠 걸리겠어.

빨리 된다고.

이렇게 수원까지 1단계로 하자, 이렇게 말씀을 하셔서 결론을 냈어요.

그리고 지가를 얘기하니까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옆에 있는 궤도를 가리키면서 내가 2개 은행에다가 몰래 수원까지 조사한 시가가 여기 나왔어.


-대통령께서 땅값을 미리 대충 조사를 하셨군요.


-조사를 했지.

내가 이렇게 보니까 한 평에 120원, 110원이야.

경기도지사가 한참 듣더니 각하, 수원에서 신갈리 거기까지 들어오려면 고속도로나 마찬가지 도로를 내야 되는데 돈이 많이 듭니다 그러니까 뭘 얼마나 든다고 그래.

그러니까 거기는 아마 한 평에 300원은 봐야 되겠습니다.

아니, 200원은 봐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300원 따져줄게.

그럼 그것만 해, 그것만 사.

그리고 돈 남으면 내가 안 받을 테니까 나머지는 돈 가지고 경비 정리나 이런 데 써.

이렇게까지 말씀 다 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어요, 옆에서.


-이 고속도로 계획에 관련해서 우선 서울과 수원간의 제1토지획정사업이 착수됐습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길이 40km, 폭 50m의 고속도로가 내년까지면 개통될 것인데 김현욱 불도저시장이 직접 불도저를 타고 이 지역에 대한 구획정리계획의 스타트를 장식했습니다.

이 사업이 완성되면 10만호의 주택과 10개의 학교, 10개의 시장이 도로변에 들어서게 되며 연인원 30만명이 동원되어 고용증대에도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까 고속도로 표층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빨리 지금 용지를 매입해서 이렇게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보면 2년 5개월 만에 끝냈는데 아무래도 부실공사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얘기를 하는데 우리 감독관들이 육군 대위들을 주로 처음에 썼는데 이 사람들한테 시방서교육을 시켰어요.

시방서교육을 시켰는데 제일 중요한 게 기층, 기층을 층장으로, 30cm, 40cm 층장을 올리면서 물리고 닫고 함께하면 또 닫고 올리고 이렇게 올라가는 게 중요했어요.

그걸 대통령께서 강조를 해서 우리가 거기다가 중점을 두었어요.

표층은 깨질 것으로 아예 가정하고 만약에 하면 나중에 하면 된다고 그러고.


-아예 처음부터 ...


-그래서 기층을 하는데 이게 현대건설이 첫째 공구로 쓰는데 이 사람들이 흙을 막 밀어대니까 감독관이 아무리 말해도 안 들으니까 누워서 막 반대하고 그러는 것을 내가 봤는데.

그러니까 차들이 수십대가 성토하다가 기다리고.

그러면 와서 전압 시험해서 오케이 하면 또 갖다 넣고 그래서 굉장히 걸렸는데 그 대신 24시간을 일하는 걸로, 3교대로.


-3교대를 시켜서 8시간씩.


-그러니까 차 1대 필요한 게 3대 필요한 거지, 쉽게 얘기하면.

그래서 우리 감독도 3교대로 하면서 감독하고.

첫째 수원까지는 아주 여간 열성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발전을 크게 뒷받침할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요즘박정희 대통령은 바쁜 시간을 짜내어 수시로 공사장을 시찰하고 일하는 산업전사들을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보신 공사는 제1공구인 경수간 고속도로 건설현장인데 박 대통령은 서울과 오산 사이의 공사를 기필코 연내에 완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여기서 경부고속도로의 제1공구인 서울-오산간의 공사현황을 살펴보면 제3한강교에서 영등포구 양재동까지 7.66km는 서울시가 공사를 담당하고 있으며 양재동에서 오산까지 38.6km는 8개 공구로 나누어 각각 공사를 서두르고 있는데 가장 난공사지역은 달이내고개 3km로서 군에서 그 공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5월 말 현재 흙을 깎고 쌓는 노반공사가 58%, 전체공사가 27%의 진척을 보이고 있으며 금년 말에는 완전히 준공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사실은 대통령 머릿속에 이미 고속도로가 다 그려져 있었던 것 같고 그걸 계속 밀어붙이고 결국은 아까 보신 그 회의 끝에 국가기관 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이라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졌잖아요.

거기의 단장이 그 당시 안경모 교통부 장관이었는데 거기는 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나보고 그러더라고.

계획조사단을 만드는데 여기서 지금 할 일은 노선을 윤 대령이 하는 식으로 노선을 대전까지 우선 잡아보고, 대전까지.

그리고 그 다음에 경제, 예산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를 여기서 연구해야 되니까 계획조사를 만들어야 되는데 그 편성표를 나를 보여주면서 여기에 허필연 장군하고 윤 대령은 여기서 끝나면 경부고속도로 일하는 데로 가고 나머지는 해산시키는 거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임시로 하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래가지고 안경모가 단장, 그 다음에 공병감은 허필연 소장.

예편된 허필연 소장, 윤영호 대령.


-역할도 다 분담을 했군요.


-부담했어요, 다 써가지고.

이게 며칠 동안 계획하는 거니까 끝나면 해, 이렇게 됐어요.

그래서 나는 계획단장 단원이 돼서 노선 선정은 내가 주동이 돼서 대전까지 가서 봤습니다.

거기도 마찬가지 지프차 타고 가서 며칠 걸려서 갔다 왔어요.

그래서 보고를 올리니까 안경모 단장이 내가 대통령께 가서 보고 올리죠 하고 대통령께 얘기하니까 윤 대령이 갔다 왔어?

그럼 틀림없지, 가봐야지.


-믿으셨군요.


-내일 헬리콥터 2대 준비해.

그래서 윤 대령 보고 앞에 타라고 그래.

우리는 뒤에 타고.


-그렇게 헬기를 같이 타고 노선 정할 때 다니셨군요.


-나는 앞에 헬리콥터 타고 뒤는 박 대통령이 타고 거기 건설부 사람들, 계획조사단원들이 같이 탔어요.

그리고 헬리콥터로 가는데 평택 가니까 내리라고 그래서 내렸어요.

내렸더니 박 대통령께서 여기 농지가 많은데 여기를 이렇게 지나가면 되겠느냐.

그러니까 안경모 씨가 각하, 여기 이리로 가도 농토, 여기도 농토인데 그냥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내 생각도 그래, 할 수 없지 뭐.

그래서 대전까지 우선 그 노선을 확정지었습니다.

그런데 길치터널이라고 했어요, 대전에.

그걸 조금 의문이 간다고 돌아갈 때는 바로 가지 말고 거기로 돌아서 가자고 해서 돌아갔더니 뭐라고 했냐면 허필연 장군하고 윤 대령은 대전에 가서 터널을 내야 되느냐, 안 내야 되느냐를 그걸 판단하고 오라고 그래서 우리 둘이 다시 내려갔어요.

내려가서 보니까 도저히 터널을 안 하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와서 그걸 올렸더니 탁 이?날 신문에 대전까지 노선 확정 하고 신문에 났어요.


-그런데 사실 고속도로 하려면 돈도 필요하고 기술도 필요하고 장비도 필요하고 또 시기적으로 봤을 때 1월달 동절기에는 얼어서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거기를 녹이면서 이렇게...


-녹이면서...

수원까지 일단 준공식을 한번 하자, 이렇게 말씀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12월이 되는데 준공식을 하려고 보니까 차가 거기까지는 충분히 통과한다고 봐야 될 텐데 땅이 얼어서 어떻게 해요.

그래서 불을 질러가면서 녹여가면서 다져가면서 이래서 준공식 날짜 전까지 해결했어요.

그래서 내가 표창도 그날 받았지만.

수원까지 일단 준공식하는 데 표창까지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훈장이지, 훈장을 받고 그랬어요.


-정말 그렇게 속사포로 만들다 보니까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에피소드도 상당히 많았던 것 같은데 정주영 회장인가가 죽을 드시고 나오셔서 지휘를 했다는.

그건 무슨 얘기입니까?


-내가 아침 5시에 지프차가 있으니까 나갔잖아요.

그랬더니 정주영 사장 차가 있더라고.


-현대건설 사장?


-현대건설 사장, 정주영 사장 차가 있어서 이렇게 보니까 밥그릇이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운전기사한테 이게 뭐야 그랬더니 죽그릇입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죽을 잡수시면서도 그렇게 나와서 일을 하시는 것을 내가 봤는데 내가 하나 에피소드를 얘기하면 내가 5시에 나왔는데 벌써 나왔으니까 얼마나 부지런한 분이에요.

내가 한번 만나가지고 내가 사장님, 정 사장님 부지런하시게 일합니다 했더니 제가 뭘 부지런합니까?

저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요.

이병철 사장은 차를 옆에다 재워가지고 밤 2시고 3시고 가자 하고 끌고 나와서 일을 보는 분도 있는데 내가 5시에 나온 게 뭘 부지런합니까, 그런 말까지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우여곡저것을 끝에 고속도로가 진척이 시작됐는데 그럼 여기서 고속도로 진행과정을 잠시 보신 다음에 얘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보다 빠르게, 보다 값싸게, 보다 튼튼하게.

이것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3대 목표였다.

장장 428km에 달하는 단군 이래 최초, 최대의 대역사였던 경부고속도로 건설.

기술과 장비, 자재 등 모든 것이 부족한 현실에서 믿을 만한 것은 오직 인간의 의지와 열정, 노력뿐이었다.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계획부터 노선, 공사에 이르기까지 관여하며 모든 것을 세세히 챙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 원 건설부 장관을 대동, 헬리콥터를 타고 경부고속도로의 노선확정지역을 시찰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입지조건과 건설상황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공중시찰에 나선 박 대통령은 건설부 장관의 현지 브리핑을 듣고 지도와 일일이 비교하면서 이 고속도로의 건설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현장시찰은 물론 오랜 연구 끝에 쌓인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전과정을 진두지휘했다.

현장에는 연인원 892만여 명 건설인력이 투입돼 휴일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속도로 건설에 매진했다.

2년 5개월이라는 짧은 기한에 맞추어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어려움도 많았다.

난공사 구간에서는 사고가 자주 발생해 공사 진척이 더뎠고 희생자는 77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전구간이 개통됐다.


-만 2년 반 동안 모든 난관과 애로를 무릅쓰고 예정대로 준공된 이 공사야말로 우리는 당초에 무모하다거나 불가능하다는 비난을 이겨낸 우리 역사상 가장 거창한 대역사라 하겠습니다.


-고속도로가 완공되고 나서도 또 그 이후에 회장님 쭉 사시면서 들으신 얘기 있을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고속도로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좀 들으셨을 것 아니에요.


-들었죠.

듣고 신문지상에도 보고 그랬는데 그 사람들 얘기가 이 고속도로가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느냐 하는 얘기들은 내가 여러 번 들었어요.

이 고속도로가 되니까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지 모르겠다.

정말 우리나라가 장래성이 있는 나라 아니냐.

이렇게들 좋게 얘기하는 것을 내가 여러 번 들었어요.

우선 김대중 대통령 같은 분도 후회한다고 그랬어요.

그때 당시에 고속도로를 왜 반대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와서 얼마나 우리가 도움을 받느냐.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당시에 그때 고속도로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가 무슨 발전을 그렇게 했겠느냐, 그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사실 토목공학이 전공이시잖아요.

그런데 장장 그 당시에는 428km, 서울에서 부산까지.

2년 5개월 만에 그렇게 완공을 하셨는데 왜 그렇게 공사기간을 짧게 잡으셨습니까?


-이 고속도로가 빨리 돼야 거기 부수적으로...


-연관되는 다른 산업이...


-포항의 제철공장, 그다음에 울산의 공단, 그다음에 구미공단, 이런 것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쉽게 얘기하면.

빨리 고속도로 해야 이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고속도로 하면 국내에서는 좋을지 모르지만 외국을 상대하는 데는 우리가 수출해야 될 공장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이런 것을 도와주려면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해야 된다.

속도를 내자고 해서 막 밀고 나갔어요.


-그 공사구간 중에 특히 대전에서 대구 사이, 그러니까 충청북도 영동 근방.

여기에 아까 말씀하신 터널공사가 많아서 희생도 많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고가 왜 그렇게 많이 났습니까,

거기는?


-거기는 대전에서 추풍령까지 노선 선정할 적에 내가 아까 얘기한 공병감하시는 허필연 장군하고 나하고 둘이서 에로나이팅비행기가 있어요, 에로나이팅.

한 사람밖에 못 타는 거.

그걸 여의도 가서 타고 거기를 몇 번 왔다갔다 하면서 정찰을 했어요.

그런데 다닐 때마다 느꼈지만 거기는 계곡으로 되어 있잖아요, 계곡.

양쪽에 산이 있고.

아주 죽을 뻔했잖아요.

거기 잘못하면 큰일나잖아요.

그래서 그걸로 보면 평지 같으면 이것저것 융통성이 있지만 융통성이 없잖아요.

그래서 거기에서 좀 고생스럽지만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가서 했어요.


-번영의 길, 고속도로.

6월 30일 개통을 서두르고 있는 경부고속도로 마지막 구간인 당제터널 공사가 세차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당제터널 공사는 경부간 428km의 고속도로의 험준한 산허리를 두른 6개의 굴 가운데 가장 길고 난공사로 알려져 굴진작업의 안전관리에 이한림 건설부 장관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당제터널이 완공되는 날 꿈에 그리던 한양 천리길이 하루의 생활권으로 연결돼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가 한결 앞당겨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금년 말에는 호남까지도 하루에 달릴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에 투입된 인원을 보니까 연인원이 892만여 명이 참여를 했던데요.

그 많은 인원이 참여를 하다 보니까 희생자도 많아서 한 77명이 희생됐던 것 같은데 회장님께서는 매년 거기 또 희생자분들 비를 세워놓은 곳도 찾아뵙는다면서요.


-70년 7월 7일에 경부고속도로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완공이 됐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와서 일한 사람들이 기념으로 우리가 하나 단체가 돼서 위령제라도 제사 지내야 되지 않느냐, 이래가지고 7.7회라는 회를 만들었어요.

7.7회.

70년 7월 7일날 준공됐다고 해서 7.7회라고 그래가지고 1년에 우리가 꼭 7월 7일날 준공하는 날 위령제를 찾아갑니다, 위령제.

아까 얘기한 공병 출신, 학군 출신, 건설부 감독하던 사람, 여기 실무자들이 모여가지고 1년에 한 번씩 위령제 찾아가요.

그리고 또 1년에 한 번씩 정초에 1월 7일에 모여서 회의하고.

그래서 허필연 소장이 초대 회장 했고 내가 2대 회장 했고 지금 4대째인가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고속도로에 참여했던 분들의 모임이 있으시군요.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애당초 처음에 4차선 서울-부산간의 왕복도로를 계획을 했는데 그렇게 왜 처음부터 넓게 잡느냐, 이런 반대여론도 있을 테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앞을 내다보고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것을 다 확보를 하고 더군다나 앞으로 넓어질지 모르니까 양쪽으로 50m를 확보해라, 또 이런 지시도 계셨다면서요?


-그렇죠, 전체가 아니고.


-일부 구간...


-내가 알기로는 천안까지인가 대통령께서 넓게 잡으라고 그랬어요.

넓게 잡으라고 하고 그 다음에 문제가 그 차선의 폭을 아까도 얘기했지만 대통령께서 정해 주었어요.

한 차선이 3.6m래요.

책을 많이 보셨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보시고 노선폭을 다 정해 주시는데 그거보다 더 넓게 잡으라고 그래서 여유 있게 잡았죠.


-그리고 이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우리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건설과정에서 나타났던 재미있는 영상이 저희 KTV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잠시 보시겠습니다.


-번영과 의지를 상징하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개통을 보게 됐습니다.

이 고속도로는 차량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며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길입니다.

이러한 고속도로상에서 교통사고 방지를 위해 차량정비를 철저히 함은 물론 승객은 운전사에게 잡담과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승객들은 운전사에게 무리한 속도를 강요해서는 안 되며 추월을 할 때 갑자기 앞으로 뛰어들어오면 위험합니다.

고속도로는 항상 청결해야 하며 깡통이나 병, 나무조각 등의 장애물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됩니다.

특히 고속도로를 무단보행하거나 횡단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차량이 고장나면 즉시 도로공사 영업소나 순찰차량에 연락을 해야 하며 도로 주변에 설치된 시설물을 잘 보호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표 파는 곳 750m 전방에서 요금을 준비하고 일단 정지한 후에 요금을 내야 하며 주행상의 유의사항을 언제나 되새기면서 즐거운 운행을 해야 되겠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됨으로써 우리 국민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많이 있었는데요.

완공되고 나서 정말 고맙다고 어느 사업가가 찾아왔다는데 그건 무슨 얘기예요?


-보일러업체입니다.

보일러업체인데 그 양반이 영등포에서 보일러를 만들어가지고 부산까지 거기까지 만든 보일러를 가서 팔고 그랬는데 그전에는, 고속도로 되기 전에는 서울역에 갖다놓고 거기서 며칠 기다려야 된대요.

그리고 기차에다 싣고 부산 가서 부산에서 또 내려놓고 며칠 기다려서 가지고 가고 그래서 날짜가 오래 걸리고 경비도 많이 나오고.

그런데 지금은 영등포 자기 공장에서 바로 싣고 바로 그냥 부산 갔다 오니까 하루, 이틀에 된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빨리 해결되고 돈도 그렇게 덜 들고 얼마나 혜택을 보는지 모르겠다고 아주 선생님 덕분에 고맙습니다.

이러면서 인사하는 것을 제가 들었어요.


-보일러업체뿐이었겠어요?

많은 분들이 정말 고속도로 혜택을 보고 그랬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셨을 때는 회장님 참 뿌듯하시잖아요.


-뿌듯한 것도 그렇지만 내가 참 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좋은 일을 했구나, 노력한 대가가 여기에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회장님도 그렇게 느끼셨는데 고인이 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그때 이걸 완공하고 얼마나 감회가 깊으셨겠어요.

혹시 들으신 말씀 같은 것은 없습니까?


-나한테 써준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뭐라고 쓰셨어요?


-역사적인 고속도로에 나와서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군에 원대복귀하는 걸 축하합니다.

그 말을 봐도 굉장히 고속도로에 관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가까이에서 보시니까 굉장히 꼼꼼하시고 자상한 분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셨습니까?


-내가 느끼는 것은 시계가 우선 오래된 세이코시계라고 그거 차고 계시고 담배도 국산담배 꺼내 피우시고 옷도 특별히 좋은 거 아니고 그리고 그냥 일만 열심히 뭘 따지시고 일만 하시고.

그리고 대통령께서 뒤에 맨 지도예요.

지도 놓고 보고 뭘 연구하시고 또 칠해 보고 노선 넣어보고 이렇게 부산까지.

실천은 나보고 하라고 하고 계획만 하시는 거죠.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은 시골의 어느 도지사나 군수나 같이 그런 인상을 주시면서 일만 그냥 열심히 하시는 분으로 내가 느꼈습니다.


-일에 묻혀 사시고.


-일밖에 모르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굉장히 정도 있으시고 자상하셨던 것 같은데 혹시 봉투 같은 건 안 받으셨어요?


-아니, 답사할 적에 불러서 갔더니 김장들 요새 안 했지?

건설부 직원 한 사람하고 박 중위하고 나하고 셋이잖아요.

그 얘기를 그대로 한다면 괜찮습니다 했더니 아니야, 김장값들 없을 거야 그러면서 김장값을 주시더라고요.


-당초에 경부고속도로가 428km에서 412km로 이렇게 줄어들고 그러니까 직선화가 많이 됐고 또 4차선에서 어느 구간은 6차선, 10차선까지도 많이 늘어났잖아요.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참 잘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드시죠?


-그러니까 그때는 계획은 있어도 돈이 없으니까.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지만 폭을 좀 넓게, 동의받을 때 넓게 잡으라는 말씀은 있었어요.


-결과론을 놓고 보면 사회간접시설이라는 건 일부의 반대가 있을지언정 좀 먼 장래를, 앞을 내다보고 해야 되겠다.

이번 박 대통령 고속도로 건설 뒷얘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늘은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처음 시작된 1968년 2월 1일 전후를 되돌아보면서 경부고속도로의 의미를 한번 되새겨봤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단순한 도로의 건설만이 아니라 인간의 땀과 노력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노력과 희생, 또 사명감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의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시청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또 대한늬우스의 그때 그 사람, 저는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와주신 회장님,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드리겠습니다.



(KTV 한국정책방송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 ⓒ 한국정책방송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