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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국민방송

저항과 긍지를 품은 땅 ‘강화’

매주 수요일에 보내드리는 테마기획,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찾아 소개하는 대동문화도 시간입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실 유연태 여행작가님 나오셨습니다.  

Q1> 지난 시간에 이어 강화 두 번째 시간이인데요, 지난주 강화의 고인돌도 보고 전등사의 전설도 듣고 참 다양한 역사와 이야기가 있던 강화라 오늘 더욱 기대됩니다.

A1> 예, 오늘은 동서양의 조화가 돋보이는 건축물 <성공회 강화성당>과 군사시설인 <광성보>등을 둘러볼까 합니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은 강화군 관청리의 성공회 강화성당입니다.

보시는 것과 같이 한국의 전통가옥형식으로 지어져 얼핏 보면, 사찰 같기도 합니다.

동서양의 조화가 어우러진 강화성당, 처마 곳곳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요, 지붕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도 있습니다.

성당 지붕엔 또 하나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요.

기와의 곡선을 활용해 만든 배 모양의 지붕은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강화성당의 외부가 동양적 이였다면 내부는 서양의 전형적인 예배당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포교 했던 성공회는 전통 한옥형식으로 짓는 강화성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대단한 정성을 보였는데요.

당시 경복궁을 지은 도편수를 초빙했고요, 백두산 적송으로 짓기 위해 서해바다에 뗏목으로 띄워 강화까지 운반 했다고 합니다.

성공회 강화성당 옆에는 조선 제 25대 왕, 철종의 외가가 있습니다.

1853년에 지어진 것으로 철종 임금의 외숙, <염보길>이 살았던 집이다

법도에 맞도록 지은 건물이라 작지만 고품스럽습니다.

현재는 행랑채 일부가 헐리고 지금은 디귿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는데요.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입니다.

이곳은 강화를 에워싸고 있는 강화산성입니다.

제23대 왕 고종이 몽고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쌓게 했는데요.

당시 외성, 중성, 내성을 모두 만들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1.2 키로 미터의 내성뿐입니다.

몽고와 화친으로 헐렸다가 조선시대에 다시 쌓았지만, 병자호란 때, 또 다시 파괴됐기 때문인데요.

온전히 돌 로만으로 지은 금의 모습을 갖춘 건 1677년입니다.  

현재 성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긴 했지만 조선후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일본침략에 의한 강화도 조약까지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아픈 역사가 담긴 현장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강화도는 해안이나 변방에 진, 보, 돈대 등의 군사방어 시설이 더 많이 들어섰다고 할수 있습니다.

1232년 고려 고종이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다시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고려왕조가 39년 간이나 머물렀던 <고려궁지>입니다.

이곳은 고려왕궁터에 세워진 조선시대 관아건물, 강화유수부동헌입니다.

강화지방의 중심업무를 보던 곳으로 여러 차례 보수해서 본래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외규장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왕립도서관 규장각의 부속도서관입니다.

이곳 역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등을 겪은 곳으로 고려 시대의 돌계단이나 기와 조각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곳은 강화유수부 이방청입니다.

나무로 된 1층의 기와집으로 디귿자 형 구조에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요.

조선시대 지방의 이방청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곳입니다.

해안가에 세워진 강화도 동부 군사기지 광성보는 1656년 효종 7년에 지어졌는데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입니다.  

대포부터 바다 17 mc대포도 보이는데요, 홍이포라고 합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재연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한 것으로 병인 양요 때 이곳에서 사용했습니다.

성벽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 한 후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 만들어졌는데요, 조선시대 광해군 때 수리를 거친 후 1679 숙종 때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습니다.

현재 광성돈대 안에는 당시에 쓰이던 대포 3문이 복원돼있습니다.

성벽을 보면 대포들과 포를 쏠 수 있게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광성보를 지키던 어재연장군과 부대원들은 포탄이 떨어지자 칼과 창으로 마지막엔 맨주먹으로 대항하여 싸웠으나 미국의 신무기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순국의 뜻을 기리는 무명용사들의 용사비만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국정책방송 KTV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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