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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국민방송

여순사건 보복의 시작 - 여수 민간인 희생 사건

프롤로그-사건의 배경 및 특성 소개
- 여수14연대가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에 불복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강경진압 방침 아래 진압작전을 펼쳐 10월 27일 여수지역 치안을 회복함.
- 이후 진압군과 경찰 등은 이미 반란군이 여수를 떠난 상황에서도 살벌한 분위기 속에 반군 협력자와 좌익 혐의자 색출을 진행, 마을별 수색과 동시에 시민들을 국민학교와 같은 공공장소에 집결시킨 후, 머리가 짧거나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사람, 지까다비(일본식 운동화)을 신은 사람 등을 색출하며 주민들을 반군 가담자나 혐의자로 분류하여 여러 장소에서 총살함. 조사나 재판 등의 적법한 절차는 없었음.
- 진압군과 경찰을 피해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이후 자수해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으며 여순사건 관련자로 체포된 이들은 재판을 받고 전국 형무소에 수감됨. 이 재소자들과 보도 연맹원 대부분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총살됨.

이정삼(81) /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이연식의 아들
- 여수시 오림동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이연식(29)은 1948년 10월 25일 오전, 비가 내려 들에 나가지 못했는데 집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군인들에게 끌려감.
# 아들 이정삼은 당시 7세로 아버지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어른들에게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만 추려 진남체육공원 앞산으로 데려가 총살했다는 얘기를 들음.
# 총살 당일, 아들 이정삼은 집마당에서 훤히 바라다보이는 진남체육공원 앞산(당시는 민둥산이었음)에서 군인들이 바위 아래로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을 보기도 했음.
#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사건 발생 3일 만에 부친의 시신을 수습했고 현재는 아들인 본인이 선산을 마련해 모셨으며 자신과 여동생을 키워준 할머니의 공덕비도 함께 세웠다 함.
# 2010년 진실규명은 되었으나 총살장소에 아직 안내판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움.

박의철(77) /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박소록의 아들
- 여수시 중앙동에서 함석제조 가게를 운영하던 박소록(36)은 군인들에 의해 주민들과 함께 서국민학교에 집합되어 있다가 큰집(부친의 형님댁)이 있는 곳에 불이났다 하여 급히 갔는데 거기서 큰아버지(부친 형님)과 함께 군인에게 잡혀 종산국민학교로 끌려가 두분 모두 주민 125명과 함께 만성리 굴에서 총살당함.
# 큰아버지 박채영은 항일운동으로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와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여수 저명인사였던 큰아버지 이름을 앞세워 반란군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큰아버지의 동생이었다는 이유로 희생을 당한 것임.
# 당시에 남은 가족은 외가가 있는 남면으로 피난을 가, 상황을 몰랐으며 몇 년 뒤 다시 여수로 돌아왔을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만성리에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묻혀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음.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때부터 제사를 만성리에서 지내면서 사촌 형제들과 함께 그 넓은 묘역을 벌초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관리해 오고 있음.
# 하여 이곳이 박씨네 형제들이 벌초를 하는 곳이라 형제들의 묘라 불리다가 시에서 여순사건 유적지 관리를 하며 억울하게 돌아가신 이름 모를 분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의미를 담아 정식으로 형제묘라 이름 붙인 것임.

박순애(85) /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3형제의 조카
- 여수시 덕충동 동장이던 박양래(34)는 막내동생 박병기(18)와 함께 종산국민학교로 끌려가 며칠간 잡혀 있다가 박양래는 군사재판으로 징역 5년을 받아 공주형무소에 수감 돼 있다고 문사하였고 막내동생 박병기는 종산국민학교에서 수십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구봉중학교 앞으로 끌려가 총살당함. 또한 박양래의 동생 박병연(21)도 여순사건진압 당시 순천 철도국 근무 중 행방불명되었는데 진압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진실규명됨.
# 희생자 박양래, 박병연, 박병기의 큰조카인 박순애씨는 자녀가 없던 작은아버지들의 진실 규명을 위해 애써 왔으며 세 분 모두 진실규명을 받음.
#사건 당시 자신의 아버지(장남)와 가족들과 함께 동네 밭으로 끌려가 있었으므로 삼촌들 이 끌려가는 걸 보지는 못했으며 며칠 후 총살 소식을 듣고 할머니와 함께 막내 삼촌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지만 총에 맞아 뒤엉켜 불에 태워져 있어서 수습할 수가 없었다 함.
# 가족들과 밭으로 집합했던 날, 군인들이 눈 앞에서 한 청년을 속옷만 입혀 놓은 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을 비롯해 사람들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장면 등을 목격함.

김길남(81) /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김인수의 아들
- 진압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색출과 총살은 여수 섬마을들까지도 예외는 아니었음. 금오도 직포마을에 살던 어부 김인수(36)는 한밤 중에 찾아온 반군의 요청으로 식량인가 무언가를 조금 내어주었다는 이유로 부역자가 되어 배를 타고 들어온 군인들에게 끌려감.
# 당시 7세였던 아들 김길남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었는데 군인들이 억지로 떼어내더니 아버지를 총머리로 때리며 데려갔으며, 형과 함께 방풍림이 있는 곳까지 따라가 군인들이 아버지를 배에 실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함.
# 어머니가 여수경찰서에 가 알아보니 광주형무소로 갔다 하여 한번 면회를 다녀오셨는데 당시로는 왕복 약 한 달이 걸리는 거리였으며 다녀와 3일을 앓아 눕기도 하셨음.
# 이후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그리로도 면회를 한번 다녀오셨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부산형무소에서 사망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음.
# ‘다 잊고 용서하자’는 어머니의 유언이 있었으나 아직도 본인은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어머니 유언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함.

김재식(75) / 보도연맹 희생자 고(故)김응생의 아들
- 반군 협력자와 좌익 색출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보도연맹에 가입되기도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부분 총살되었다. 여수시봉산동 주민 김응생(28)은 14연대에 지인들이 많아 페인트, 목재 등을 납품하고 공사를 도맡아 했는데 반란이 일어나자 지인들의 요청으로 마을 인민위원회 일을 도왔다가 쫓기는 신세가 됨.
# 피신 중 밀고를 당해 아버지를 잡으러 온 특무대에게 외삼촌과 외할아버지가 고초를 당하자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와 자수를 했고 이후 재판을 받고 광주형무소에 두달 복역 후 풀려나 보도연맹에 가입을 했음.
# 한국전쟁 발발 직후 진남관으로 소집령이 떨어져 집결했다가 여수경찰서유치장으로 이송, 며칠간 구금되어 있다가 배에 실려 남해바다 애기섬으로 끌려가 수장되었음.
# 시신없이 제사만 지내오다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으며 오랜세월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에 의한 트라우마가 남아 여수를 떠나 살고 있음.

서장수(73) / 보도연맹 희생자 고(故)서정삼의 아들
-여천군 율촌면 조하리 마을구장이던 서정삼(36)은 기차를 이용해 순천으로 향하던 14연대 반군들에 의해 율촌역에 모인 뒤 율촌지서 무기고를 지키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반란 진압후 친구분이 있는 진해로 피신했다가 후에 집안어른의 권유로 자수해 보도연맹에 가입함.
# 부친이 피신해 있는 동안 경찰들이 집을 태우고 어머니를 마을 당산목 앞으로 끌고 가 매질을 하는 등 모진 고초를 겪었음. 보다 못한 당숙이 이듬해 세상이 좀 잠잠해지자 아버지를 찾아가 자수를 권유했다고 함.
# 보도연맹 가입 후 농사지으며 살고 있던 아버지를 율촌지서 이학수 순경이 찾아와 연행해 갔고 다음날 어머니가 지서로 찾아가니 이미 여수경찰서로 넘어갔다 하여 기차를 타고 여수까지 가 면회를 갔으나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고 함. 당시 어머니는 장수씨를 임신한 만삭의 몸이었음.
# 부친의 일은 집안의 금기사항처럼 여겨져 자세한 내막을 모르다가 노무현정부 때 진실규명 신청하면서 애기섬에서 수장되었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고 2021년 4월부터 여수유족회장을 맡아 한 사람이라도 더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회복 하는데 기여하고자 함.

진실규명 및 에필로그
-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전남 보도연맹 사건, 2010년 여수지역 여순사건 등의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사과, 위령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역사기록 정정 및 수록, 평화 인권교육 강화 등을 권고하였음.
-2022년 1월 21일은 여순특별법이 시행된 날이다.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기다려 온 결실이기도 하지만 긴 세월 지역에서조차 금기 시 되었던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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