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많은 국민들이 원조받은 식량을 배급받으며 생활했던 적이 있었죠.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은 이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변했습니다.
그런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하는데요.
그땐 그랬지, 식량 원조를 받던 시절을 김제건 국민기자가 살펴봤습니다.
김제건 국민기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태평양의 파도를 박차고 부산에 도착한 8천 톤의 양곡. 이것은 미국의 대한 US 달러 원조비로 구매한 것입니다.”
“그중에서 8만 석은 즉시 공무원 양곡 배급용으로 배정됐는데 이번 보리 말고도 5만 6천 5백 톤의 보리와 4만 5천 톤의 밀이 2월 중에 미국의 식량원조계획에 의해서 도입될 것이며..”
부산과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원주 식량을 작은 배에 옮겨 싣는 작업이 분주합니다.
첫 번째 원조 식량이 들어온 날 대통령이 항구에 나갈 정도로 식량 확보는 절실했습니다.
1960년대 초중반에도 식량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혼 분식장려 정책도 활발히 펼쳤습니다.
“정부에서는 몇 해 전부터 식생활 개선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영양가로 봐서 쌀에 못지않은 밀가루나 콩, 보리쌀을 섞어 먹도록 장려해왔습니다.”
“분식이 권장되고 있는데도 나는 모르쇠로 나가는 국민이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쌀 세 알에 보리 한 알이 무슨 잠꼬대냐는 듯이 버젓하게 쌀을 튀겨 심심풀이로 먹는 강심장도 있습니다.”
인터뷰> 원정수 / 서울시 구로구
“쌀과 밀가루가 부족해서 꽁보리밥만 먹었던 생각이 나죠. 그 후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야 라면과 밀가루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입니다. 이곳에는 우리들이 어려웠던 시절, 원조를 받았던 시절, 1950년대가 남긴 여러 물품들이 역사의 증거물로 전시돼 있습니다.
원조와 기증의 의미로 악수하는 두 손이 인쇄된 밀가루 포대와 '산타 마리아'란 글이 쓰여진 드럼통같이 큰 분유통.
6·25 한국 전쟁 이후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우리의 사정은 원조 식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인터뷰> 박승애 / 서울시 강서구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 말까지도 미국에서 온 분유 가루를 학교 교실에서 배급받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난해 5월,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캄보디아와 미얀마에 쌀 750톤 원조를 시작한 이래 올해도 쌀 원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태극무늬의 쌀가마니가 가득 쌓인 배가 아프리카 4개국에 긴급 식량 지원을 위해 출항했습니다.
올해는 총 5만 톤이 지원됩니다.
인터뷰> 김현수 /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과거 쌀 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지위가 바뀐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입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원조하는 나라가 된 대한민국.
어려웠던 시절 고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민리포트 김제건입니다.
( KTV 국민방송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 ⓒ 한국정책방송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