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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약탈문화재 환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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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임창순(임창순**)
등록일 : 2003.05.27 12:27
일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국민운동의 필요성과 국민의 참여에 대해..
아래의 글은 한겨레신문 및 여러곳에서 모은 자료를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혼이라고 할수 있는 우리 문화재 반환은 꼭 이루어 져야 합니
다. 지금도 일본은 약탈한 자료를 이용하여 전세계에 동아시아 역사를 왜곡
시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료부족으로 반박조차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한국현대사 연구자 커밍스에 따르면 구미 유수의 한국사 또는 동아
시아 연구자들은 아직도 한국사를 중국이나 일본 역사의 아류나 부속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사의 의미는 기껏해야 중국 문명을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독자적인
문명에 전달하는 비주체적 통로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
디로 말하면 한국에는 독자적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동아시아 역사는
중국사와 일본사뿐이라는 이야기로 ‘일본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동아시아
를 바라보고 있는 현실을 투영해 주고 있습니다.
주도면밀한 계획과 막대한 투자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의 날조인 것입니다.
약탈한 문화재및 사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역사를 재구성
한 뒤 학계라는 시장에 풀어놓았으니, 서양인들이 이렇게 보는 시각은 크
게 잘못될것이 없는것이지요.

냉전체제 붕괴 이후의 국제정세 변동 속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어떻게
유지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새뮤얼 헌팅턴이 고안해낸 ‘문명 충돌론’은 그
런 사료 편식의 한 예를 보여주는것으로 , 문화 또는 역사의 기초 텍스트가
얼마나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기존의 편견과 인식오류를
어떻게 확대재생산해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완벽하게 성공했고, 이젠 동아시아인들 조차 자신들의
역사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이라는 거울 또는 안경을 통하지 않고는 불
가능하게 된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굴절’은 거울과 안경의 속성 중 하나
이죠.

미국의 보수적 시사주간지 《타임》(2월 4일자)이 뜻밖에도 이 일제 거울
과 안경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몰염치한 폭력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이치겠지만 그 제조과정에 미국이라는 패권국가가 얼마나
커다란 기여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기획기사를 실었습니다.
《타임》에 따르면 20세기 초중반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관학자와 민간수
집가들, 수많은 대학 관계자들이 개성·경주·평양 등 조선 전역으로 벌떼같
이 몰려들어 땅속 무덤이나 절·전각에 있던 고구려, 백제와 신라, 고려, 조
선의 유물들을 마음대로 파헤치고 부순 뒤 몽땅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때 국립박물관 관리로 개성의 약탈현장을 둘러봤던 83살의 한 생존자(동
포)는 《타임》에 증언하기를 “무덤들은 텅 비고 파괴돼 있었다.” “주민들
이 내게 와서 ‘그들(일본인들)이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며 조상들 무덤을 파
헤쳤다’고 하소연했다.”고 말 했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문화재 약탈의 중심인물로 오구라가 지목되는데, 1903년에
일본 전기회사의 우두머리로 조선에 온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그런 약탈 과
정과 결말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가 얼마나 무덤들을 파헤치고 다녔던지 그에게는 ‘두더지’라는 별명이 붙
었고, 그가 일본으로 가져 간 각종 청자와 청동불상, 그리고 5∼6세기의 가
야 왕릉들의 금관 등 수많은 금세공 장신구들은 지금 도쿄 국립박물관에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1100여 점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이 약
탈품들은 지금도 정기적으로 수십 점씩 번갈아 가며 전시되는데, 기막히게
도 그 다수는 ‘출처불명’이라는 딱지가 붙은채 전시된다고 합니다.

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츠 교이치(1907년생)는 조선총독부가 “문서가 아니
라 발굴 현장을 통해 조선 문물을 확인하고 싶어했던” 관학자들을 대거 동
원해 무려 15권 분량에 이르는 〈약탈 목록〉을 작성했다고 고백한 바 있는
데, “일단 발굴한 것들은 총독에게 바쳤고 총독은 거기서 천황에게 헌상할
것들을 골라냈다.” 라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사업가나 연줄을 구하는 자들은 너도나도 조선 유물들을 파헤치고 입
수해 상전에게 바쳤고, 이렇게 해서 나중에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 당한 이
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은 재임 4년간 1천 점 이상의 청자들을 모았다고 합
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855점의 서예작품과 432권의 서적, 2천여
점의 청자와 청동거울 등을 긁어모아서, 이른바 ‘데라우치 컬렉션’을 세우기
도 했습니다. 그 중 일부는 일본 야마구치여자대학에 남아 있었는데 일제
패망 뒤 극히 일부가 한국에 반환됐습니다.

2000년 4월, 북일 수교교섭 제9차 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을 때 북측은 일본
에 ‘약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