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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국민방송

돌아오지 못한 20대 - 군 의문사 사건

프롤로그-사건의 배경 및 특성 소개
-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정권안정을 위해서는 학원통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1981. 4. 2. 국방부장관에게 소요 관련 학생들은 전방부대에 입영 조치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보안대는 학생운동과 관련되어 징집된 병사들에 대해 동향관찰, 감시 활동을 하는 한편, 학원의 운동권 세력의 조직 및 활동에 대한 정보 입수와 동향 파악을 위해 학생운동을 하다가 강제 입영 된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녹화·선도사업을 입안 시행했다.

정수희 / 군 의문사 피해자 고(故)정성희의 동생
- 연세대학교에 입학 후, 일차 문무대 훈련 당시 시위를 선동하고 노래를 선창하였다는 이유로 문교부 블랙 리스트에 기록된 뒤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11월 25일 학내시위에서 연행돼 동료 14명과 함께 강제로 입영 됐음.
#1981년 흥사단아카데미와 학내에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는 조직에 가입해 활동하다 1월 28일 육군 5사단으로 강제징집을 당했음.
# 부대생활 중 지휘계통과 보안부대의 관찰, 면담이 수시로 이루어졌고, 사망하기 전 입대동기가 사신관계로 보안사령부에 구속됐고, 학교 선배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범으로 오인되어 보안사령부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정성희의 학교동료들을 언급, 경찰과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음.
#19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해 강제징집, 녹화사업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가 됐고, 사망소식을 듣고 달려간 가족들은 자세한 사망 관련 내용은 듣지 못한 채 군 당국은 서둘러 화장함.
# 군 동료들과 소대장, 중대장, 보안부대 병사 등은 휴가 전후 정성희 씨가 보안부대에 호출되어 갔다고 하나 보안부대 관계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음.
# 국방부 순직 결정(2018년)

최종순 / 군 의문사피해자 고(故)최우혁의 형
- 1984~85년까지 서울대 경제법학연구회라는 서클활동.노동운동은 1986년도부터 시작.
# 이후 1986년 4.28 입대를 했고, 87년 6, 7월경 동생한테 편지가 왔는데 군대 가기 전 제적상태였기 때문에 복학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편지를 했음.
# 처음에 6월초, 60여단에 배치 받아, 한 달 후 경비소대에서 근무 이유는 서울대 출신이라 행정 서류 작업 등에 대한 기대를 한 것 같고, 동생은 키는 크지만 경비소대에서는 자세가 안 나온다는 것이라고 했음.
# 이후, 가족이 면회를 갔는데 동생 팔이 골절 되어 있었고, 신병이니까 조교들이 유격 훈련을 심하게 시키고 발로 차고 해서 팔이 부러져서 파견의무대에서 입원해 있었다고 함.
# 그때까지 특별한 게 없었고 이후, 보름 있다가 의문사를 당했음.
# 동생의 경우 프락치 활동을 지시한 서류들이 있는데, 당시 보안사에서 존안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음.

박정관 / 군의문사피해자 고(故)이윤성의 매형
- 1982년 11월 3일 학생의 날, 종로1가부터 종로6가까지 가두시위에 참가하여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혜화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당시, 6천 명이 가두시위를 했음.
# 다음날인 11월 4일, 징역살이와 군 입대 중 선택 강요. 가족들은 11월 5일 날 강제징집을 (현역입영대상) 선택해서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11월 7일 새벽에 신체검사도 받지 못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음.
# 2대 독자이고 시력이 나빠 보통의 경우에는 현역 입대가 불가능한 조건이었음.
# 맨 처음 전방 5사단에서 가까운 지역 향토사단에서 신병교육받고 최전방GOP로 배정받았고, 강제징집 된 후 군대 생활은 소대장 증언에 의하면 모범 사병이었음.
#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5월경 군당국으로부터 이윤성이 북한에서 날려 보낸 삐라의 일종인 안전보장증을 가지고 있었던 일로 죽음 직전까지 군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았고, 군수사기관에서 조사가 끝난 후 자대로 돌아가 목을 매 자살했다는 통보를 받았음.

한영희 / 군의문사피해자 고(故)한희철의 누나
- 당시, YMCA회원으로 들어오라고 동생이 권유를 했었고, 성남 가톨릭대 학생연합회 활동도 했고, 가톨릭 서클 지오세 활동을 비롯해 성남대학생연합회, 서울대 연합회 등 활동을 많이 하면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민주화와 민중운동을 시작했음.
# 당시 주민등록증 일제 갱신 시기여서 수배 중인 운동권 학생들이 도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도와주려다 이 사실이 보안사에 발각되어 휴가복귀 후 부대근무 중 83년 12월 6일 보안사령부로 연행, 이 사건으로 군부대 녹화사업을 받게 되었음.
# 입대 전 학생시절의 민주화운동과 야학연합회 사건 관련 혐의로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5일 동안 취조를 받고 난 후 12월 10일에 석방돼 부대에 복귀했고, 그 다음날인 12월 11일 새벽 4시 30분경 부대 내 문서 보관창구 앞 보초서는 자리에서 가슴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 한 채로 발견됨.

에필로그
- 군 의문사 사건이 현대사에서 갖는 역사적 함의 및 기억해야 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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