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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국민방송

광기의 집단학살 - 보은 민간인 희생 사건

구영회(76) /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고(故)구범서의 아들
-산외면 봉계리는 사건 당시 20여 명의 청년이 희생되어 보도연맹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마을 중 한 곳으로, 당시 24세였던 故구범서는 집안에 남로당에 가입한 좌익활동가가 있었던 연유로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었고, 이후 산외지서 소집명령에 응했다가 서지리에서 총살됨.
# 아들 구영회는 아버지가 산외지서에서 오라는 연락이 와서 제발로 가셨는데 이후 바로 내북면 서지리로 끌려가 총살되었다고 집안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었음.
# 부친 사후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연좌제 무서워 무언가 시도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겨우 농사 조금 짓다가 기술 배워 작은 시계점을 하며 먹고 살았다.

조성훈(77) /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고(故)조철행의 아들
-산외면 산대리에는 남로당 활동가들이 더러 있었지만 국민학교만 겨우 나와 글도 잘 모르던 조철행은 농사만 짓던 사람으로 이장에게 도장을 맡겨 놨다가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었으며 산외지서 소집 명령에 응했다가 내북면 서지리 뒷산에서 총살됨.
# 아들 조성훈은 어머니에게 듣기로, 부친이 밭에서 일하던 중 산외지서로 갔는데 지서에 구금도 않고 바로 서지리로 끌고가 총살당했다고 함. 양력 7월15일이었다고 들음.
# 당시엔 무서워서 총살지에 가지 못했고 며칠이 지나서야 집안 어른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지만 찾이 못해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갔고 어머니가 부친 속옷에 달아준 주머니를 보고 시신을 찾아 산대리 선산에 모셨다 함.

이상영(90) /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故이상수의 동생
-1950년 당시 50호 가구가 모여 살던 산외면 길탕리에는 서울서 학교도 다니고 공부 좀 한 사람이 좌익활동을 했는데 그이가 동네 청년들을 모아 함께 활동했다고 한다. 그 이후 길탕리 청년 여러명이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었고 24세였던 이상수 역시 그 중 한 사람으로 동네 청년들과 함께 산외지서에 잡혀갔다가 보은면 교사리 보은농고 옆 고개에서 총살됨.
# 동생 이상영은 형님이 들에서 일하다가 산외지서 순경들이 와서 데려갔다고 어머니에게 들었고 바로 다음날 교사리로 끌려가 총살되었다는 소문이 남.

신영휴(77) /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고(故)신기석의 아들
-장안면 봉비리 사람인 신기석은 해방 후 장안면 건국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며 5.10선거 반대운동 등을 펼치다 우익?년들에게 쫓겨 피신을 다니기도 했고 보도연맹이 조직된 후 강제로 가입이 되었다 함. 아들 신영휴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임.
# 전쟁이 나기 전 우익청년들은 새벽에 집에 들이 닥쳐 구두발로 방에 들어와 세간살이를 다 뒤집으며 아버지를 찾아내라 행패를 부리곤 했다.
# 전쟁이 나자 피난을 가기 위해 보리를 찧으러 갔던 아버지를 경찰이 된 친구분이 찾으러 왔고 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그 친구분과 함께 외속리지서로 갔다가 그대로 구금됨.

조부제(80) /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고(故)조충재의 아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조충재는 작은아버님의 선거 출마를 돕기 위해 고향인 보은면 교사리로 내려왔다가 전쟁을 맞았고 며칠 뒤 경찰들이 새벽에 집으로 들이닥쳐 끌고 가더니 7월 중순쯤 미륵뱅이에서 총살됨. 보도연맹 가입여부도 확실치 않았음.
# 형님이 붙잡혀 간 뒤 아버지가 바로 보은경찰서를 찾아가 왜 죄없는 아이를 끌고 가느냐고 따졌는데 경찰이 죄가 없으면 금방 풀려날 것이라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고 돌아오지 못했고 동생 조부제는 당시 곡기를 끊고 울기만 하던 어머님의 모습과 시신 찾으려고 사방을 수소문하고 다니셨던 게 기억이 남.

박용현(77)/ 독립운동가, 보도연맹희생자 고(故)박원근의 아들
-박원근은 일제강점기 서울 중앙고보를 다니다 인쇄업에 종사하며 삼인회를 조직해 활동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인물. 해방 후 고향인 보은에 정착해 살던 중 전쟁직후 보은 경찰 김달용에게 연행돼 길상리 미륵뱅이에서 총살 됨.
# 부친은 1934년 삼인회 활동으로 구속 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1941년에는 금산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 돼 전주형무소에서 2년 옥살이를 겪었다.
# 출소 후 고향으로 돌아와 뒤늦게 결혼한 부친은 3남1녀를 낳고 마차 임금조합에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에만 집중하셨는데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을 하면 잘 먹고 잘 살게 해준다는 말에 보도연맹에 가입하셨던 걸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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