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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국민방송

공포와 야만의 기억 - 옥천 민간인 희생사건

프롤로그-사건의 배경 및 특성 소개
-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좌우익의 충돌이 충청북도 일원에서 끊이지 않았으며 옥천
영동 등에서는 집회 해산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함.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7월 20일
군경이 옥천에서 후퇴하기 직전까지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을 예비검속과 집단총살.
- 국민보도연맹 옥천군연맹은 1949년 12월 22일 결성. 1950년 7월 12~18일 사이 경찰에 연
행 혹은 소집, 옥천경찰서 유치장과 각 지서 창고에 구금된 뒤 7월 17~20일 사이 차례로 실려가 최소 450~500명이 동이면 평산리 들미, 군서면 말무덤재 등 여러 곳에서 사살 됨.
당시 가족들은 희생장소를 모르거나 시신부패가 심해 대부분 시신을 수습 하지 못함.
- 10월 수복 후에는 인민군에 부역한 이들에 대한 처단이 실시됨. 경찰에 연행 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거나 부역자의 가족이란 이유로 일가족이 몰살당하기도 함.

보도연맹 희생 유족 육의균(80)
- 한학자이자 이원만세운동을 이끈 육창주 독립지사의 비극적 최후
# 육창주, 고종황제 장레식 참석 후 집에서 태극기 만들어 이원면 장터에서 만세운동 주도.
공주형무소 5년 실형. 해방 후 한학서당하며 촬동가들 숨겨주곤 하다 수시로 경찰조사.
# 보도연맹 가입 여부는 확실치 않고 전쟁발발 직후 경찰에게 끌려가 말무덤재 총살 추정.
# 시신도 수습 못하고 유품하나 못남겼으며 아들 육의균은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다 기계만드는 기술 배워 화사를 설립하기도 햇으나 IMF 실패 후 택시운전.
# 이원면에 기념비가 있으며 박정희정권 때 독립유공자 세 번 거절. 2005년 애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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