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 장단에 살아 숨 쉬는 아버지" - 휴먼토크 『내 마음의 고백』 12월 4일(금) 저녁 8시 40분 방송 - |
□ KTV 한국정책방송원(원장 손형기)은 이 시대, 희미해져가는 ‘인정(人情)’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을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40분부터 방영한다.
□ 이번 주는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신명나는 장단으로 외길 인생을 바쳐 온 사물놀이의 대가, 김덕수씨를 만나본다. 그는 1957년 다섯 살 때부터 남사당 무동으로 데뷔한 후 남사당의 일원이 되어 50년이 넘는 외길 예인 인생을 걸어왔다. 특히 그는 1978년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창단해 사물놀이의 세계화와 대중화 힘써 왔는데, 이런 그가 있기까지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다섯 살 때 남사당 입문으로 사물놀이 인생을 시작하게 해주고 50년 넘는 예인 인생의 큰 버팀목이 되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매니저 겸 파트너, 그리고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 열정의 글로벌 광대, 김덕수의 외길 인생 이야기와 오늘의 그를 만들어 준 아버지에게 전하는 특별한 고백을 휴먼토크 『내 마음의 고백』에서 만날 수 있다.
이 보도 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한국정책방송(KTV) 방송지원과 추동진 PD(☎ 02-3450-2248)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붙임 1.
신명으로 세상을 두드린 글로벌 광대 김덕수!
열정과 신명으로 걸어 온 반세기 외길 인생
□ ‘5세 때 무동으로 데뷔, 7세 때 ‘뛰어난 장구 실력’으로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을 거머쥔 신동 출신. 중?고등학교 시절 리틀엔젤스예술단 단원 겸 선생으로 이미 지구촌을 누빈 세계화의 선도자. 정치적인 이유로 꽹과리와 징·장구·북을 야외에서 칠 수 없었던 시절 오히려 이들 악기만을 모아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사물놀이’의 창시자. 재즈와 힙합, 비보이와 사물놀이를 결합하는 크로스오버 공연을 개척한 국악계의 창조자. 고교 졸업장으로 대학 교수가 된 학력 파괴 선구자….’ 이는 모두 글로벌 광대 ‘김덕수’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특히 1978년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창단하여 사물놀이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힘쓴 것으로 유명하다.
□ 대전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 김문학(벅구 놀이의 명인)으로부터 남사당 예인의 기질과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장구를 다루었다. 그러던 1959년 불과 일곱 살의 나이로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받아 일찍부터 ‘장구의 신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악예고 졸업 후에는 전통 예술 공연 단체의 일원으로 전 세계 50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이러한 자신감으로 1978년 ‘사물놀이’를 창단, 국악으로 세계를 누비는 새로운 역사를 쓴다. ‘해방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김덕수의 음악적 실험은 1995년에 창단된 ‘한울림 예술단’에서 비롯된다. 매년 150여회의 국내외 공연을 통해 클래식 오케스트라, 무용, 재즈, 팝, 월드 뮤직,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전통예술의 다양한 가능성과 함께 ‘한국적인 월드 뮤직’을 다듬고 있다.
광대 인생의 매니저이자 파트너
사물놀이 장단에 살아 숨 쉬는 그리운 아버지
□ 김덕수는 3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전쟁 후 전국이 가난하던 시절,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신 아버지의 덕으로 남사당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당패와 인연을 맺어왔던 터라 어머니의 끈질긴 반대도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 덕수가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게 될 아이가 사내라면 사당패 친구들에게 사당패에 내놓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매니저 겸 파트너, 그리고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아버지가 공연을 하지 않고 보호자로 따라다닌 적이 많았으며 아들이 공부와 건강에 소홀할까봐 늘 신경을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