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섬 소안도, 소안도는 완도 인근의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국가유공자를 배출한 섬입니다.
한반도 최남단 완도에서 뱃길로 한시간
잘룩한 허리를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로 나눠어 진 섬 소안도
소안도가 항일운동의 발원지로 주목 받게 된 것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한 후입니다.
일제는 조약 체결 후 토지 조사를 통해 소안도를 친일세력인 이기용에게 소유권을 넘겼습니다.
이에 격분한 소안도민들은 1909년 토지 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소안 항일 운동 기념사업회 위원장을 맞고 있는 장수 씨는 당시 소유권 반환 소송은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 민족에게는 항일 투쟁 그 자체였다고 역설 합니다.
또한 한일 합방으로 조선 왕조가 무너지게 되자 배움만이 일제를 몰아 낼 수 잇다는 이념으로 1913년 김사홍선생 주도 하에 신교육 기관인 중화학원을 세웠습니다.
1924년에는 배달 청년회가 조직 돼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시작 했으며 1927년에는 또 하나의 비밀 결사대인 일심단이 결성 돼 광복 때 까지 조선 과 일본 그리고 중국 등에서 투쟁을 지적 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안의 항일 운동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일제의 탄압 역시 심화 됐습니다.
일제는 소안 배달 청년회 개편대회 선언서를 문제 삼아 13명의 항일 운동가를 체포해 갖은 고문을 했으며 이때 소안 항일 운동의 상징적인 지도자인 송내호 송기호 선생 등이 숨졌습니다.
당시 배달 청년회 일원이 던 김남천 할아버지는 당시를 회상 하며 일제에 만행으로 섬 주민들에 고충은 이뤄 말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같은 고문과 탄압에도 소안도 주민들은 13년이라는 긴 투쟁으로 소유권 소송에 승소 했으며 독립 운동가들이 옥살이 할 때면 한 겨울에도 이불을 덥지 않는 등 섬 주민 모두 항일 투쟁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먼동이 트는 아침. 민족의 섬 소안에는 그 투혼 그 기상 그 용맹이 14일도 솟아오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