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화 앵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으라. 그리고 너흰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보내는 유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8년 전이었던 1932년 4월 29일.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사건이 중국 상해에서 벌어졌습니다.
24살의 젊은 조선 청년이 일본 상해군 파견 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을 즉사하게 하고, 일본 육군 9사단장 등을 척살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는 일제가 상해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을 축하하는 천정절 축하식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젊은 청년은 혈혈단신으로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식장 안으로 들어가, 준비한 수통 폭탄을 연단에 침착하게 던져, 일제군 장성들을 처단한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탱크와 비행기, 대포, 기관총 및 수천 명의 무장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그곳을 뚫고 들어가서, 보란 듯이 폭탄을 던진 것입니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고, 윤봉길 의사는 자결하려고 준비해간 도시락 폭탄을 터뜨리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잡혔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윤 의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승리와 성공의 미소였습니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4억의 중국인들은 한 조선 청년의 대담성과 용기에 놀랐습니다.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젊은 청년이 해냈다는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윤봉길 의사의 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청년단 단장인 김구 선생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려고 찾아다녔고, 김구 선생을 만난 장개석은 무조건적인 도움을 약속했습니다.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 창설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1940년 광복군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이후 임시정부로 물밀 듯이 자금 지원이 들어왔고 임시정부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1943년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 약속된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는 것입니다.
그의 영웅적인 죽음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서 있음을 한치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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